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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의 신학 + 1
미가의 신학 (미가 2:1-13)    미가서는 작은 이사야라고 불리는 미가 선지자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가 1-2장은 첫 번째 설교인데 그 내용은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미가 2장은 첫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으로서 선지자 미가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이라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각각 신학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신론자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도 신이고, 돌도 신이고, 해도 신이고, 달도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범신론자”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신은 내 신이고, 네 신은 네 신이다”라고 말하며 각각 사람마다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신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란 각 사람이 신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 신학”과 “옳은 신학”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신학도 있고, 거짓된 신학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신학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신학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의 거짓된 신학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사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오도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는 미가서 2장에 ‘올바른 신학의 3대 원리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심판의 신학” (1-5절).  1-5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어떤 원리를 따라 심판 하시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밤이 되면 침상에 누워 편안히 쉬지 않고 악한 계획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약한 백성들의 밭과 집을 빼앗을 것인가?’라는 악한 계획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악한 계교를 세우는 이유는 그들의 손에 권력과 법을 주무르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를 악용해서 약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조상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의 포도가 탐스럽게 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봇은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고, 우리 조상 대대로 농사지은 땅이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왕이라도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합은 침상에 들어가 누워버렸습니다. 그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왕인 당신이 그거 하나 빼앗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며, 거짓된 증인 둘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습니다. 아합과 같이 권력을 가지고 기업과 땅과 밭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백성들은 빼앗겨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약한 백성들의 집과 밭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앗수르 군대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너희의 집과 밭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슬프다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죄 많은 자나 죄 없는 자나 하나님께서 동일한 형벌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동해보복”의 원리입니다. 라틴말로 ‘Lex’라는 말은 법이란 뜻이고, ‘Talionis’는 보복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입니다. 남의 눈을 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눈을 뽑으시고, 남의 이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이를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릴 계획을 세우시고, 지도자들이 밭과 집을 빼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밭과 집과 산업을 빼앗으십니다. 또한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슬프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 과거의 신정 통치 국가의 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 7:15). 남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놓고서 자기가 거기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서 7장에 보면, 악한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궁궐에 출입을 하는 대신입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갈 때 유대인 모르드개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풀리지 않아 모르드개의 민족 모두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달아 놓았는데, 그 장대에 하만이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길로틴이라는 사람이 남의 목을 자르려고 교수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교수대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자기가 그 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저녁에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빼앗은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 앞장서게 하여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칼이 당신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 집안에는 자식들끼리 죽이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처를 겁탈하는 일이 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해보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남을 죽인 자는 자기도 죽게 된다는 동해보복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세의 심판이든 내세의 심판이든 자기가 저지른 죄와 같은 종류의 형벌을 주시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많은 형벌을 주시고, 적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적은 형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7-48). 똑같이 맞을 일을 했어도 알고 저지른 자는 많이 매 맞고 모르고 저지른 자는 적게 매 맞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적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많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이고, 적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적은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죄를 저지른 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은밀하게 지은 죄, 공개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크게 지은 죄, 작게 지은 죄 등 우리의 삶 가운데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어도 벌을 안 받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죄가 있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를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하시지만 믿는 자는 그 심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 버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면죄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올바른 말씀해석의 신학” (6-11절).  미가 시대의 악한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미 2:11). 선지자가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포도주를 풍성히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 그러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출세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복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많이 누리며 처첩을 천명이나 두었고, 지혜가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병 낫는 것들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성경해석이 편파적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 2:7). 미가 2장 7절은 세 개의 질문입니다. 두 개는 거짓 선지자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미가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첫째로, 여호와의 신이 어찌 편급하시냐는 질문을 합니다. 편급이라는 말은 영어로 ‘Impatient’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렇게 참을성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미가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예언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참을성이 없어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이냐? 미가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기를 그치라.” 거짓 선지자들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거짓 선지자들은 이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행위가 그러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가나안 땅도 주시고 왕도 세워 주셨는데 어찌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느냐? 심판은 하나님의 행위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출애굽기 34장 6절만 읽고 7절은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7). 아버지가 악을 저지르면 삼사대까지 죗값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천대까지 인자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자식들이 삼사대까지 아비의 죄값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잘한 것은 천대까지 복을 주고 잘 못 한 것은 삼사대만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서 끊지 않으면 우리 자손 삼사대까지 우리 죗값이 내려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면 삼사대가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바람을 피웠다면 삼사대가 그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에 우리의 죗값을 끊고 우리 후손들에게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심판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반쪽 진리는 비 진리입니다.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 진리는 부패한 삶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짓은 무엇입니까?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미 2:8-9). 이렇게 잘 못된 사상을 가진 백성들이 하는 짓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안한 사람들을 지나가는 것을 잡아 겉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부녀들을 집안에서 쫓아내고 자녀들이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거짓 사상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미 2:10). 너희같이 악한 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가 심판의 말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여 유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켜 심판이 거두어진 것처럼 심판의 메시지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출애굽기 34장 6절은 취했어도, 7절은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하나님께서 은혜도 주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가는 성경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선포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균형 있게 해석 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가 신학의 바른 원리입니다. 3. “올바른 구원의 신학” (12-13절).  미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중에도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남은 자의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쫓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미 2:12-13). 이것은 미가가 ‘올바른 구원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 따라서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을 하시지만,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전부 보스라의 양떼 같이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스라의 양떼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앞에 앞장서서 원수들을 공격하고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전쟁은 지휘관이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인 전쟁은 지휘관이신 하나님께서 앞에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게 보호와 인도와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앞장서서 길을 열어 주시는 “바알브라심”의 하나님입니다. 사무엘하 5장 20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서시고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동네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붙였습니다. 그것은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 앞길에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모아서 특별히 돌보시고,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공격해왔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일 수 있겠지만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원의 신학’입니다.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망할 때에도 기생 라합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이 다 망해가는 것 같아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이방인의 택한 자를 접붙여서 교회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적인 이스라엘인 남은 자들을 건져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그루터기가 되고,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돌감람나무였는데,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택한 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역사의 운행 계획이고, 미가의 구원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한 자를 건져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이고 옳은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찾아낸 위대한 기독교(개신교) 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들도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죗값을 십자가로 다 옮기셔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이고, 구원의 결과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돌보심이며 하나님께서 길을 여는 자가 되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현대인은 진리를 상대화하려 하거나, 탈신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길은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처럼 외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산다는 것이고, 진리가 상대화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상대화되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윤리의 기준이 없어지고, 삶이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학을 기피하고 탈신학화를 표방합니다. 신학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져 죄인이 되었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천하에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다시 살 때는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슬프지 않고, 질병 없는 영광스런 육신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믿는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워도 가야 될 길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평생 정도를 행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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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의 종말사 + 1
제1장 식물을 저축하라 명하심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18-22). 제1절 노아에게 식물을 저축하라 명하심 “보라, 나 곧 내가 땅 위에 물들로 홍수를 일으켜 생명의 호흡이 있는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리니,…그러나 내가 너와는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올지니라. 모든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에서, 너는 각기 둘씩 방주 안으로 가져와서 너와 더불어 살게 할지니 그들은 수컷과 암컷이라. 새도 그 종류대로 가축도 그 종류대로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것도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 오리니 그것들로 생명을 보존케 하라”(킹성경 창 6:18-20)고 하시며 모든 양식을 저축하라고 명하셨다. 1. 하나님의 설계대로 방주를 지음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 6:15-16). 이렇게 방주를 짓되 노아의 뜻대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대로 방주를 지으라는 것이다. 14절 여기 ‘방주’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데바’니 운전되어 가는 배가 아니고, 다만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건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인류를 멸하실 때에도 그를 경외하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홍수에서 구원하실 방침을 세우신다. 이것을 보면 ① 그는 신실한 성도를 언제나 기억하시며, ② 그는 한 지방의 신이 아니고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에 세계적 홍수 가운데서도 그의 백성을 보호하실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청’(코페르)은 나무 기름으로 만든 아스팔트 같은 것이다. 그것을 방주에 칠함으로 물 들어올 틈이 없어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을 때도 하나님께서 제시한 식양대로 지으라고 여러 곳에 명하셨다. “등잔 일곱을 만들어 그 위에 두어 앞을 비추게 하며 그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정금으로 만들지니 등대와 이 모든 기구를 정금 한 달란트로 만들되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37-40). “또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고 했다(출 26:28-30). “또 그 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단 양편 고리에 그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 단은 널판으로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출 27:6-8). 이렇게 하나님의 성막을 하나님이 지시하신 설계대로 식양대로 지으라 명하셨다. 만일 설계대로 방주나 성막을 짓지 아니했다면 준공 검사를 받지 못하는 것을 물론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큰죄를 범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도 금, 은, 보석으로 신앙의 집을 지으라 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2-13).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고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신령한 집을 건축하되 금, 은, 보석의 집을 건축하라고 명했다. (1) 방주를 설계대로 지으라.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 6:15-16)고 하였다. 이는 방주는 짓되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으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성소를 식양대로 지으라 하심: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8-9)고 하신대로 모세는 성소를 지었다. (3) 성막 전체를 산에서 보인 대로 지으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4-5). (4) 신앙의 건축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축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이는 영혼이 구원받기를 위한 신령한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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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등대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슥 4:1-14)  오늘 본문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모두 여덟 개의 환상을 보았는데 이 환상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16년 동안 중지했던 성전을 짓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은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은 화석류 사이에 홍마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마 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께서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통해서 성전을 재건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재건의 주역은 유다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네 뿔의 환상인데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그 뿔이 높고 정치적으로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환상은 손에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장과 광을 척량하는데 성전을 지을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짓도록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며 깨끗한 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할 사람이 여호수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지을 주체로써 여호수아와 함께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슥 4:6)  다섯 번째 환상의 첫 번째 목적은 스룹바벨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19번째 왕이었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야긴은 고니야 혹은 여고냐라고도 하는데 이 왕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죽지 않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윌므로닥이 바벨론 왕이 되자 감옥에서 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주어서 말년을 아주 평안하게 살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여호야긴은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에 자식을 낳은 것이 그가 한 가장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이 왜 중요한 인물이냐면 스룹바벨에서 10대를 내려가면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요셉이 나옵니다. 그리고 11대 자손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스룹바벨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스룹바벨을 격려하여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하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1. 다섯 번째 환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스가랴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가 스가랴를 깨우고는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스가랴가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순금 등대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발 옆에 보니까 좌우로 감람나무가 두 그루가 있고 두 개의 관이 연결되어서 주발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발에는 일곱 개의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일곱 개의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렇게 24시간 동안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에 불이 켜지는 것이 스가랴가 본 순금 등대의 환상입니다.원래 순금 등대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규례입니다. 모세의 규례는 출 25장, 37장 그리고 레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금 한 덩어리로 연결해서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 한 개의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있어서 도합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대에 사용하는 기름은 반드시 순수한 올리브기름이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서 100% 순수한 기름으로 불을 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순금 등대가 성소 안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 저녁에 들어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며 아침에 들어가서 불을 끕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순금 등대와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무엇이 다릅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첫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제사장이 올리브기름을 부어야 됩니다. 손으로 직접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와 주발로부터 관이 연결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올리브기름이 공급됩니다. 둘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지만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24시간 불을 켠다는 점이 다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의미를 몰라서 천사에게 물어봅니다. 2. 다섯 번째 환상의 일차적인 의미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기름입니다. 순금 등대에 기름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 등대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이 빛을 비추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면 성령의 지속적인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스룹바벨은 성전을 꼭 지어야 되느냐? 그 이유는 바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입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빛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칸트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인간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어둠에 처한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위해 성전이 꼭 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전을 완공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공급되는 기름이 있어야 성전 재건이라는 사명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가진 집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파워, 군사적인 힘, 경제력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많아도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또 능이라고 것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도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성전 재건을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부은 바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산 같은 방해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함했고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 성전 짓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평지처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 4:7). 둘째, 시작한 일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슥 4:9). 공부하는 학생이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려면 논문을 끝까지 써야 하듯이 성전을 짓기로 시작했으면 끝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끝내는 것은 끊임없이 공급되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B.C. 520년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B.C.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가리켜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고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게 하셔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3. 다섯 번째 환상의 궁극적인 의미  이 예언은 성전의 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신약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순금 등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 동의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일곱 금 촛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환상은 신약의 교회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금 등대가 끊임없이 기름을 받아서 빛을 비추듯이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빛 비추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교회를 향해 명하신 첫 번째 사명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좌파를 물리치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야지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하지만 구제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태어나 왜 살고 죽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승리는 어디에 달려 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승리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네 가지 중요한 일을 행하십니다. 1) 그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2)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3)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배하십니다. 말과 생각, 행동까지도 지배하십니다. 4)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중생이나 내주는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지만 성령의 충만과 능력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과 우리 성도들의 성공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나 받으면 되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도 필요하지만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이 국밥장사를 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끓이는 국밥은 왠지 맛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작곡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님 아들이 작곡하는 노래가 대한민국에서 1, 2등 합니다. 그 많은 작곡가가 있어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작곡하는 노래는 유행가라도 1등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위 논문을 쓸 때 박사학위 논문이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우리말로 쓰는 것도 어려운데 영어로 써야 하니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주시더니 하루에 15장씩 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일 만에 다 써버렸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노래하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정치하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행하는 작은 일이라도 격려하고 기뻐하십니다. 스룹바벨은 손에 다림줄을 잡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이 손에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 4:10). 우리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어도 주님께서 다 아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전을 짓는데 한 사람이 돈을 크게 내서 짓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300억을 다 내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1원이라도 내가 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여 드린다는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1원으로 성전이 지어지겠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1원이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순종해서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눈으로 보시고 기뻐하시며 능력을 부어 성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이 다릅니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지도자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모세, 다윗, 여호수아, 솔로몬,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어림도 없었는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다가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도 죽이고 했는데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불순종하자 성령께서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두 눈이 뽑혀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울도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이 한 예언을 따라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까 가정이 화목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한 장 더 읽으십시오. 사울 왕이 예언도 하고 별짓을 다 하다가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왔다가도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났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성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불신자 안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청년들은 절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과 악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함께 살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과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다섯 번째 환상은 결국 성도의 인생과 교회의 모든 사역의 성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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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포도나무
쓸모없는 포도나무 (겔 15:1-8)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부활의 감격을 맞이한 지 한 주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부활절을 맞이하여도 아무런 감격이 없고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감각한 심령들이 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또 부활하셨다는 것은 며칠이고 밤을 지새우면서 감격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인들은 감동도 감격도 없고 그저 ‘작년에 지나간 부활절이 올해도 또 되었구나’ 하는 식으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11:17)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이 되었다고 하여도 우리들의 신앙마저 메말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마저 감동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항상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에 비유한 경우는 네 가지입니다. 첫째, 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감람나무로 비유 할 때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롬11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참 감람나무이고 이방인은 돌 감람나무인데,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참 감람나무를 찍어버리고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게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감람나무라고 할 때에는 언약관계에 있는 택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무화과나무에 비유되었습니다. 막11:13~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들어가셨을 때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를 드시려고 했는데, 어느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깜짝 놀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해 저주받은 나라라고 하는 의미일 때에는 무화과나무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셋째, 찔레나무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특별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나쁜 나무라 할 때에는 찔레나무로 비유가 되었습니다. 눅6:44절에 찔레에서는 포도를 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넷째,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겔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요15장은 교회를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겔15장, 요15의 공통점은 15라고 하는 숫자입니다. 15라는 숫자는 포도나무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장은 교훈도 비슷하고, 그 내용도 상호보완적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교회를 포도나무로 비유한 이유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잘 맺어야 성공하는 나라요, 교회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성도 개개인의 영혼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잘 맺어야 축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 관계는 감람나무, 영적관계는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신약의 교회, 성도 개개인의 영혼에 적용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2.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에스겔 15장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은 15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먼저 포도나무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왜 하나님이 심으시고, 왜 존재하고, 포도나무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궁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습니다. 궁전을 짓고, 성전 지을 때에 사용한 나무는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백향목은 쭉쭉 뻗은 나무이고, 견고합니다. 좋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건축자재로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꾸불꾸불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마리아의 상수리나무는 부드럽고, 강도가 있기 때문에 가구를 만드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가구를 만들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부드러워서 쉽게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건축자재로도 빵점이고, 가구 만드는데도 빵점입니다. 또 포도나무는 연료로도 사용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빨리 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도나무는 무슨 목적이 있는 것입니까? 포도나무는 나무 중에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사사기 9장에 보면 사사 기드온이 자식을 일흔 한명을 낳았습니다. 일흔 명은 처에게서 낳고, 한 명은 첩에게서 낳았습니다. 첩의 자식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바위위에 올려놓고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만 가까스로 피신했습니다.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 우화를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을 찾는데, 감람나무 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안 된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안 된다고 합니다. 포도나무보고 왕이 되라 하니깐 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가시나무 같은 존재인데, 그 가시나무가 왕이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 요담의 우화입니다. 삿9:12~13“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자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어서 포도주를 만드는 게 목적이지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5:2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면서 바라시는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은 좋은 포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복을 받은 나라입니까? 우리나라 거봉 포도 정말 맛있습니다. 얘기만 해도 침이 넘어갑니다. 나주 배는 정말 맛있습니다. 사과도 정말 살살 녹습니다. 대한민국은 과일이 맛있는 나라입니다. 포도나무는 맛있는 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좋은 포도열매를 맺기를 원했지만 나쁜 들 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찍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평과 의로움을 바라셨는데 도리어 포악과 횡포의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원하는 열매는 공평의 열매, 의로움의 열매, 정직의 열매, 겸손의 열매, 정의의 열매, 진실의 열매, 평화의 열매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교만하고, 거짓되고, 불의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도 그리스도를 한 번도 말해 보지 않고, 그 편을 들지 않고, 시간과 물질도 드리지 않는 사람이 열매를 맺느냐는 것입니다. 스펄전이 어느 집에 심방을 했습니다. 부인에게 남편은 교회 나오는데 당신은 왜 나오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제 남편은 교회 가서 잘 하는지 몰라도 집에 오면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 남편이 교회 안 나가면 제가 벌써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의의 열매와 공평의 열매를 맺어야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2. 포도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뿌리가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잘라 땅에 심는다고 열매가 맺어집니까?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조금만 틀리면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런 일이 발생하는데 성도 오천 명이 되는 곳에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 보면 하나님 말씀은 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씨를 좋은 땅에 뿌리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서 삼십, 육십,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밭에 뿌려진 씨는 싹이 곧 나오는데 햇볕이 쬐면 뿌리가 얇아 타버립니다.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안 드려도 되는데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인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야 될 우리를 당신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또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뿌리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어지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정녀에서 탄생한 것을 누가 믿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서 맡기신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 지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느 교회 교인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하면 안 됩니다. 푸른목장교회 성도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적 뿌리가 박혀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둘째, 끊임없이 돌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돌보지않으면 스스로 뻗어 나갈 수 없습니다. 항상 돌봄이 필요합니다. 잠언 24장 30절로 31절을 보면 돌보지 않은 포도원이 어떤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포도원이 있어도 항상 돌보지 않으면 가시덤불이 덥히게 되고 잡초가 납니다. 그리고 돌담이 무너져 멧돼지와 여우가 들어오게 됩니다. 교회도 그렇고, 성도의 영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돌봐야 합니다.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잡초가 있으면 뽑아내야 합니다. 교회도 끊임없이 보호해야 합니다. 울타리 세우고, 물주고, 살펴보고 간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하는데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내가 안 해도 잘 되리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돌봐야 하고, 교회도 돌봐야 합니다. 마 21:33절에 예수님이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 주인은 울타리도 둘러야 하고, 망대도 쳐야하고, 구유도 파야 합니다. 그런 돌봄이 없이는 포도나무가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버팀목을 해 주지 않으면 올라 갈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교만 할 수 없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힘으로 올라 갈 수 없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돌보는 농부의 도움이 필요한 나무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잘 맺고 있어야 생존과 열매 맺기가 가능하고, 항상 돌보아야 열매 맺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지 치기를 해야 합니다. 가지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15: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올해 과실을 맺었다고 그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가지치기를 확실히 해 주어야 합니다. 전지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바빠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전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지를 쳐야 합니다. 자주 갔던 모임도 줄여서 가야 합니다. 넷째,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줄기에 붙어 있지 않은 포도나무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줄기에 떨어진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15: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워서 힘이 없으십니까? 예수님을 가까이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의 파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도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서 그 힘을 받지 않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성령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힘이 더 납니다. 인생이 약해지고, 비관해 진다면 영혼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예수님께 붙어 있다면 속사람이 강건해 질 것입니다. 3. 좋은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그 결과는 뻔합니다. 도끼로 찍어 불에 던져집니다. 겔15:7~8절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요15:6절“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지옥은 불신자가 가고, 사단이 갑니다. 사단은 지옥에 가도 지옥이 좋습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을 싫어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또 여러 가지 봉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관계가 없고, 예수를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옥 불에 던져 졌다고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리고 불신자가 지옥에 있다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오니깐 교회 헛것 다녔다고 비웃습니다. 또 교회 다니며 맺은 열매나 교회 안 나가며 내가 맺은 열매나 동일하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지 않으면 세상으로, 먼지 가운데로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경건의 열매, 정의의 열매, 전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잘 살펴야 합니다. 물주고,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악령이 떠나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외치며 명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항상 가까이 해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로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서 1대1로 하나님을 향해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않으신 분은 오늘 저녁 교회에 나오셔서 일대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쓸모없는 가지를 많이 치셨으면 농부이신 하나님이 칼을 들고 와서 자르기 전에 스스로 자르시고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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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택
좋은 선택 (눅 10:38-42) 이 시간에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자유세계가 다 좋은데 적응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매일 매일 내가 선택하며 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에 겨운 말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가치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고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가장 좋은 선택을 한 마리아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이 집에 오셔서 무엇을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르다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한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가장 좋은 선택은 어떤 것일까요?   1. 그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눅12:22-31에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의식주만큼 귀한 것이 있을까요? 물질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노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노년기에 돈이 없으면 그것은 재앙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신앙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서 영육 간에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37:25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의 열매를 구하기 전에 축복의 나무를 구해야 하는데, 축복의 나무가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래서 신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솔로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주셨습니다. 순서가 거꾸로 되어서 안 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믿음을 첫째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의식주보다 돈보다 무엇보다 신앙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2. 더 좋은 선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가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가정을 말합니다. 가족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족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성경은 가족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가족이 첫째가 되어 우상이 되면 오히려 가족에게 복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비결은 하나님 잘 경외하여 하나님으로 내 가족을 사랑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20:3-6“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집에도 가족사진 대신 말씀을 많이 걸어놓으세요. 신6:6-9에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 더 좋은 선택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히11:24-26“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면서도 자기 백성들을 위해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 편안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마25:40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고후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막10:29-30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이대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 마지막 더 좋은 선택은 주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눅10:41에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이처럼 봉사도 좋지만 먼저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없이 봉사하면 며칠 봉사할까요? 마르다처럼 봉사가 앞서면 짜증 나고 불평하고 힘이 듭니다. 반면 말씀으로 잘 무장하면 무엇을 하든지 탄탄한 신앙이 밑받침하기 때문에 업적을 남겨도 교만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됩니다. 하늘의 상이 쌓이고 믿음이 시냇가의 나무처럼 무럭무럭자랍니다.   지금 우리는 가치관의 혼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더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천하보다 귀한 것, 의식주보다 귀한 것, 가족보다 귀한 것, 편안함보다 귀한 것, 대접보다 더 귀한, 예수 믿고 하나님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더 좋은 선택을 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하진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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